(고린도전서 10:1-13) 시험

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 외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가운데서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견디다(고전 10:13).

사도 바울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말하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.

. 하나님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을 주신다는 점을 강조. 이것은 하나님의 시련에는 자신이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타락과는 대조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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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편으로, 사도 바울의 말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됩니다. 당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, 어려움이 하나님의 시험이라 여겨도 충분히 견딜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줍니다.

. 그러나 이 말에는 그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.

.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는 것은 이것이 사람의 한계를 알아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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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나님이 사람에게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능력과 한계를 아신다는 뜻입니다.

.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공산품의 능력과 한계를 아는 사람이 그것을 설계하고 제조하는 것처럼 인간의 한계와 능력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라는 것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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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시련이라고 부르는 어려움은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서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부분이다.

. 인간은 육체적인 어려움을 이겨내야 육체적인 축복을 준다는 관점에서 시련을 이해하지만 하나님은 다르게 생각하십니다.

.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몸은 어쨌든 소모적입니다.

, 주어진 삶의 기간 동안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도구와 같은 형태입니다.

. 너무 늙고 약하다. 한마디로 소비.

인간의 입장에서 어떤 형태로든 몸을 소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피해야 할 일입니다.

. 사이트는 사람들이 테스트로 인식하는 사이트의 본질입니다.

. 그래서 당신이 인생에서 직면하는 어려움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된 존재로서 당연한 것입니다.

, 어쩌면 강박적인 소비와 욕구. 시련만 견디라는 말은.

자동차 브레이크를 생각해 보십시오.. 브레이크, 보다 구체적으로 브레이크 패드에 ​​대해 생각할 때 제조업체의 의도는 패드가 디스크에 마찰을 일으켜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는 것입니다.

. 결과적으로 라이닝은 필연적으로 마찰을 통해 갈고 가열되고 마모됩니다.

. 그러나 이 어려운 어려움은 시험이 아니라 존재의 목적이다.

. 마찬가지로 제조업체나 사용자는 성능 이상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습니다.

. 이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느니라.

그렇다면 우리가 자주 이야기하는 시험은 우리 존재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.

.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환경에서 소비되는 육신의 삶과 그 소비에서 겪는 어려움이 원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임을 알게 됩니다.

, 창조의 목적을 모르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육신의 삶에서 겪는 어려움은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인식될 것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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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불순종이 낳은 잘못된 인식은 잘못된 해결책으로 이어집니다.

.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을 새기면 이미지로 아이돌이 된다.

. 그리고 마음에 기댈 수 있는 목표를 정하거나 만든다면 그것도 우상입니다.

.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하나님의 뜻과 신분에 반하여 육신의 문제 해결에 의지하는 존재라면 그 사람은 이방신이고 우상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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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은 죄 때문이 아니라 몸의 소모 때문입니다.

. 더 나은 신체적 웰빙은 훨씬 덜 중요합니다.

. 오히려 진짜 죄는 이 어려움을 죄로 여기거나 더 나은 육체적 행복을 위한 정제나 시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.

. 그것은 하나님의 뜻, 하나님의 정체성, 따라서 인간 존재의 목적과 정체성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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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가 시험으로 여기는 육신의 소모와 그로 인한 어려움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우리의 존재 목적 때문입니다.

. 이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.

. 낮은 삶은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의 의지를 위해 몸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.

. 같은 이유로 그는 유대인의 뜻에 따라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었다.

. 그래서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.

. 이것이 복음이다,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. 이생의 역경은 하나님의 무의미한 시련이 아니라 우리가 견뎌야 하는 존재의 목적이다.